Hello, F*cki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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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0일 · 16분 읽기 · 조회 82 · 💬 0

개발을 하다보면서 절절히 느끼는 한가지.

정말 무서운 버그는 사실 코드에 없다.

그건 설계 문서 첫 페이지, "이건 당연히 참이겠지"
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전제 속에 숨어 있다.

전제가 틀리면 그 위에 무엇을 쌓든 소용없다.

그렇게 되면 코드는 우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틀린다.

"우리는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리처드 도킨스

기분 나쁠 만큼 단호한 이 한 문장이, 현대 주류 과학의 설계 문서 맨 윗줄에 적힌 전제다.

인간의 자아는 유전자와 뇌신경이 빚어낸 정교한 착각이고, 우주에 실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과 그 상호작용뿐이라는 선언.

이 문서에 서명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스템 이론과 창발성, 범주 오류의 언어로 결재를 반려했다. 환원주의 진영도 가만있지 않았다. 와인버그, 데닛, 핑커가 세 갈래 방어선을 치고 정면으로 받아쳤다.

측정 가능한 것만을 진리로 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패러다임.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자.

1. 비판론자들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

먼저 비판론자들의 이야기부터 끝까지 들어보는 게 예의다.

물리학자 P.W. 앤더슨은 1972년 《More is Different》에서 짧은 문장 하나로 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을 단순한 근본적 법칙들로 환원시키는 힘은, 그런 법칙들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P.W. 앤더슨 《More is Different》

분해할 수 있다는 것과 조립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시계를 톱니바퀴까지 다 해체했다고 해서, 톱니바퀴의 운동 법칙만으로 "이 물건이 시간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기능은 부품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그건 한 층 위에서 따로 작동한다.

생리학자 데니스 노블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정면으로 겨눈 《생명의 음악》에서, 자기 전공인 심장 연구를 증거로 내민다.

심장의 박동은 이온 채널 하나하나의 동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 리듬은 세포와 조직, 신경계가 한데 얽힌 더 큰 시스템 안에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채널을 아무리 완벽하게 알아도, 거기서 박동이 자동으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유전자가 아래에서 위로 생존 기계를 짓는다는 도킨스의 위계를, 노블은 그대로 뒤집어 세운다.

생물학자 리처드 르원틴의 비판은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DNA 독트린》에서 환원주의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하나를 지목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사회의 차원으로 무비판적으로 끌어올리는 행위.

"개인적인 공격성과 국가의 공격성을 혼동하는 것은, 개인이 남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 느끼는 급격한 호르몬 분비와, 전쟁의 원인인 자연자원·교역 통로·농산물 가격·노동력의 가용성 등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호르몬 분비와 국가의 전쟁 결정은 같은 차원의 사건이 아니다. 둘 사이에 비유는 있을 수 있어도, 인과는 없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종종 두 차원을 매끄럽게 잇는다. 개인이 공격적이니 국가도 공격적이라는 식으로.

진화심리학자 길리언 브라운과 진화생물학자 케빈 랠런드가 《센스 앤 넌센스》에서 가한 비판은 더 방법론적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진화론에 열광한 나머지, 잠시 멈춰서서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발전시키거나, 사회과학 문헌을 읽거나, 대안이 될 만한 설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문제에서 저 문제로 즉흥적으로 옮겨 다니며 피상적인 이야기만 지어내기 일쑤였다."

케빈 랠런드 《센스 앤 넌센스》

이건 가설 검증 기준을 더 엄격하게 세우라는 학문적 요구다.

진화론적 설명이 매력적인 만큼, 그 설명이 다른 가능한 설명들과 제대로 경쟁했는지를 따져 묻자는 것.

마지막으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그는 러셀과 함께 《수학 원리》를 쓰면서 수학 전체를 논리로 환원하려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가 한계에 부딪치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가 《과정과 실재》에서 제시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개념은 환원주의의 가장 깊은 곳을 겨눈다.

측정의 편의를 위해 도입한 추상적 모델을, 실재 그 자체로 착각하는 오류. 그는 이것이 근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함정이라고 보았다.

다섯 사람의 비판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분해할 수 있는 것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측정한 것과 존재 그 자체는 다르다.


2. 환원주의자들의 세 방어선

이 비판들에 대해 환원주의 진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방어선은 크게 세 갈래다.

첫 번째 방어선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쳤다.

그는 "거시 현상을 미시 법칙으로 지금 당장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새로운 독립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계산 능력이 부족할 뿐이라는 것.

컴퓨터가 충분히 강력해지고 알고리즘이 충분히 정교해지면, 결국 모든 거시 현상은 미시 법칙으로 재구성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두 번째 방어선은 대니얼 데닛이다.

그는 거시적 인과를 끌어들이는 시도를 '하늘에 매달린 갈고리(Skyhook)'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힘 같은 건 없다는 것.

우주의 모든 복잡한 구조는 밑바닥의 단순한 부품들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크레인(Crane)'으로만 설명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세 번째 방어선은 스티븐 핑커다.

그는 르원틴의 비판에 학술적으로 응수하는 대신, 그의 정치적 성향을 공격했다.

"르원틴이 유전자 결정론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적 편견 때문이다.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면 평등 사회의 이상이 흔들리니까, 억지로 생물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논증이 아니라 논증자를 겨누는 공격이다.

세 방어선을 합치면 환원주의 진영의 자세가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것은 결국 미시 법칙으로 환원될 것이며(와인버그), 그 외의 설명은 사이비이고(데닛), 거기에 반대하는 자들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핑커).

나는 이에 대해 감히 의견을 말해보려 한다.

3. 다시 생각해보자

3.1 자율주행차의 오류

주류 과학계가 이토록 당당하게 "자아는 환상"이라고 결론 내린 배경에는 강력한 실증 데이터가 있다.

뇌의 특정 부위를 다친 환자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인격이 변한다. 신경전달물질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물리적 신체를 건드렸더니 내면의 의식 상태가 변한다" 이 인과 관계는 너무도 분명해서, 그들은 뇌라는 물질계가 곧 자아의 전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비판론자들이 "창발성"과 "시스템 계층"을 들어 반격하자, 와인버그와 데닛은 이렇게 받아쳤다. "지금 설명하지 못하는 건 우리 계산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 거기에 새로운 원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 논리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고 본다. 비유로 풀어보자.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를 떠올려보자.

차에는 수많은 센서가 달려 있다. 날씨, 도로, 보행자, 다른 차량... 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감지한다. 센서는 '물리적 육체와 뇌신경망'에 대응한다.

센서 표면에 먼지가 쌓이거나 신호에 노이즈가 끼면 차량은 경로를 벗어난다. 이때 센서를 닦고 신호를 보정하는 작업, 즉 방법론적 환원주의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건 환원주의의 정당한 영역이며, 부정할 수 없는 도구다.

그런데 주류 환원주의자들은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센서를 청소했더니 차량이 다시 부드럽게 굴러간다.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봐라, 센서만 잘 보정하면 차량의 거동이 완벽하게 통제된다. 그렇다면 이 차량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상위의 목적 설정기, 운전사, 혹은 자아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센서들의 전기적 신호가 이 시스템의 전부다."

이 비약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센서를 청소한 행위는 단지 '주체가 다시 정상적으로 입력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운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아니다.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의 오류를 복구한 사실을 빌미로, 그 위에 있는 목적 계층 전체를 삭제해버리는 것 — 이게 정확히 화이트헤드가 말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다.

센서의 전기 신호값은 차량의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편의상 정해둔 추상적 표상이다. 그 표상이 현상을 잘 예측한다고 해서, 표상이 실재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와인버그가 말하는 "계산 능력의 부족"은 방법론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이지, 그 방법론 너머에 다른 계층이 없다는 존재론적 증명이 아니다.

데닛의 Skyhook 비판도 같은 결로 빗나간다. 그는 "위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힘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하지만, 비판론자들이 말한 것은 신비한 힘이 아니다. 앤더슨의 'More is different'는 마법이 아니라, 시스템이 일정한 복잡도를 넘어서면 새로운 규칙성이 출현한다는 관찰이다.

3.2. 청류파(淸流派)의 덫

환원주의 진영이 꺼내든 두 번째 방어선은 더 적나라하다. 핑커는 르원틴의 과학적 비판에 학술적으로 응수하지 않았다.

대신 르원틴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을 공격했다.

요지는 이런 식이다.

"당신이 그런 주장을 하는 진짜 이유는 이념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의 주장은 들을 가치가 없다."

이 공격이 영리한 이유는 분명하다. 비판의 칼날을 논증이 아니라 논증자에게 겨누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영리함이 자기 함정이 된다.

후한 말기,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지식인 관료들이 스스로를 '맑은 물(청류파)'이라 부르며, 반대파를 '탁한 물(탁류파)'로 묶어 정치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누가 그들을 청류파로 규정했는가?"

다름 아닌 청류파 자신들이었다.

심판과 선수를 동시에 맡아 권력을 독점하는 이 메커니즘은, 현대 과학계에서 '과학주의(Scientism)'라는 이름으로 형태만 바꾸어 살아남았다.

물론, "헤게모니로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그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환원주의가 권력 구조를 통해 확산되었다는 점과, 환원주의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별개의 문제다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핑커의 반박이 진짜로 무너지는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르원틴의 비판을 "마르크스주의 편견"이라는 한마디로 환원해버린다. 그러나 르원틴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개인적인 공격성과 국가의 공격성을 혼동하는 것은, 호르몬 분비와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문장 어디에 마르크스가 있는가. 이건 차원의 혼동을 지적하는 방법론적 비판이다.

르원틴이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이 비판은 그 자체로 검토되어야 한다.

'가설 검증 기준을 더 엄격하게 세우라는 요구'말이다.

이건 진보적 이데올로기도 보수적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그냥 학문의 기본 자세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이 요구마저 종종 정치적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묘한 아이러니가 생긴다.

인간은 그저 유전자의 목줄에 묶인 기계라며 자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반대파의 사상을 검증하고 비판할 때는,

누구보다 뜨거운 신념과 분노라는 '자아'를 풀가동한다.

유전자는 타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화를 내지 않는다. 그들의 격렬한 학문적 권력투쟁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생동하는 자아의 실존을 증명한다.

헤게모니를 쥐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지는 않는다. 파워 게임에서의 승리와 존재론적 진실은 전혀 별개의 영역이다.

3.3. 그들만의 신앙고백

환원주의자들이 마지막으로 꺼내드는 카드는 예측력(Predictive Power)이다.

"우리가 분해한 모델이 현실을 잘못 본 것이라면, 어떻게 이 모델로 질병을 고치고 레이저를 만들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가? 성공이 곧 진리를 증명한다."

와인버그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였다.

"당장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계산 능력이 부족해서일 뿐이다. 언젠가 컴퓨터가 충분히 발전하면 모든 것이 물질적 인과로 설명될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런 주장을 '약속어음적 유물론(Promissory Materialism)'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장 지불할 현찰(증거)은 없으면서, 미래의 기술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약속어음만 남발한다는 것이다.

부도가 날 수도 있는 어음을.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뉴턴 역학을 떠올려보자. 수백 년 동안 압도적으로 성공했다. 그 성공으로 뉴턴 역학은 한때 우주의 절대 진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뉴턴 역학은 일정한 조건 안에서 매우 유용한 근사일 뿐, 우주의 궁극적 구조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예측력은 모델의 유용성을 증명한다. 모델이 실재의 전부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상을 측정하기 위해 편의상 정해둔 방법론적 규칙을 우주의 절대적 존재론적 진리로 격상시키는 것 ─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한 오류의 가장 정면이다.

물리주의자들이 칠판을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 채우고 "당신의 가치관, 고뇌, 자아는 유전자의 생존 본능과 뇌세포의 착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윽박질러도, 한 가지 사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바로 그 수식을 읽고, 그 모순을 짚어내고, 그것에 반대 의견을 적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의식' 자체.

이것이 그 어떤 수식보다도 먼저 확인되는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이유는 신학적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출발점이었다.

우주 배경 복사라는 흔적을 보고 빅뱅의 존재를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빅뱅 이전의 특이점을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창발된 자아의 기원도, 환원주의의 렌즈로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는 유보된 영역이다.

그리고 기원의 비밀을 손에 쥐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 여기 숨 쉬고 있는 주체성마저 유령 취급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지동설을 부정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재판정을 나오는 그의 입에서 한 문장이 새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E pur si muove)."

환원주의가 의식을 착각이라 선언한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여기 있다.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바로 그 의식이라는 주체가.


이 글을 쓰며 참고한 자료

학술 논문 및 저서

환원주의 진영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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