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오답노트, 조선 전기(前期) - 나는 잘 공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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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6일 · 24분 읽기 · 조회 89 · 💬 0

두서 없지만, 그냥 막 말해볼까.

한국사를 마지막으로 공부한게 벌써 10년도 넘었으니 말이다. 왜 조선 전기까지만이냐면, 글이 아주아주 길어지것 같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 전기만으로도 충분히 길어질 것 같다.. 또한 한국사를 전공한 사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주 엄밀한 고증에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각설

우선, 조선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나눠진다라는 것은 기준점이 있다라는 이야기다. 그 기준점은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이러구 있을 때가 아니다 -> 일오구이 -> 1592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히 200년 전, 조선이 건국된다.

1392년에 말이다.

나는 전한길 수업은 안들었지만, 전한길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라면 '일삼구이 -> 성계리 -> 이성계 -> 조선의 건국'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보통 조선왕조 500년으로 알고 있는데, 수치적으로 보면 딱 250년을 중심으로 나누어야 겠지만, 보다는 어떠한 '변곡점'이 되는 중위 시기의 '사건'을 기준으로 나누는게 더 적합한 것 같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라는 기준점으로 200년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합리적인 듯 싶다.

그럼 이제 1392년 조선이 어떻게 건국되어졌는가 부터 조선 전기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려말선초라는 것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고려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라는 뜻이다.

고려는 우선 '태조 왕건' -> '왕'씨의 나라다. 그리고 불교국가다. 그리고 왕건이 나라를 건국할때, 왕권을 키우기 위해서 지방 호족들과 결혼을 아주아주 많이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문벌귀족'이라는 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문인이고, 또한 음서제도(자식에게 관직을 물려줌)로 권력을 세습하였다.

또한, 문인들의 권세와 별개로 무인들에 대한 무시도 엄청 심했는데 김부식(삼국사기의 저자)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를 만만히 보고는 그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일화들만 보더라도 무인들의 입지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알 수 있다.

자꾸 무인들을 무시하고 화나게 하니, 결국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이 때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은 세계사다.

이즈음 무슨일이 있었느냐면, 바로 흑사병보다 무섭다는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의 출현이다.

이 몽골제국에서 중국대륙에 원나라를 건국하고 전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동방의 변방인 고려는 이 원나라가 팽창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찰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팔만대장경', 삼별초의 항쟁 등, 원나라와 마찰을 빚었다.(이기기 위함은 아니고, 저항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항쟁)

원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흡수한 것과 다르게, 고려는 신하의 나라로서 흡수하지 않고 종속국으로서 남겨졌다.

슬프게도 고려는 원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나라에 흡수된 나라도 있다라는 점에 비하면, 고려가 벌꿀오소리마냥 마냥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까.

어쨌든 이 때 등장하는 세력이 바로 '친원파' 권문세족이다. 이들이 원과 가깝게 지내며 득세하는데, 득세하는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백성들을 착취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항상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이때 등장하는 신흥세력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이다.

'신흥' 무인이라 구분하는 이유는 아까의 무신정변의 무인들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세력이기 때문이다.

원래 나라가 혼란하면 외세가 자꾸 침범하게 되는데,

이러한 왜구와 오랑캐들을 때려잡으면서 성장한 세력이 바로 신흥무인 '가별초'의 이성계 되시겠다.

또한 신진사대부 하면 대표적으로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이 있겠다.

이들은 모두 뜻이 같았다.

'지금 고려에는 문제가 있다.'

이즈음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바로 원명교체기인데

원은 쇠퇴하고, 명은 흥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원나라는 고려에게 명을 치도록 요구한다. 이 신흥세력들은 당연히 거부한다.

군대에서도 내일 모래 나가는 말년병장(원나라)보다 실세 상병(명나라)이 더 무서운법.

이때 친원파인 권문세족의 최영 장군이 '명'을 칠것을 명한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의 말씀받들자. 노래로도 부를만큼 검소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 장군님이시다.

참고로 최영장군은 권문세족이지만,

요즘으로 따지면 착한일진.

일진이긴 하지만 착한 일진 그런 느낌 말이다.

아무튼,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명을 치러 군사를 이끌고 북진을 시작한다.

이성계는 '사불가론'으로 명령의 철회를 말하였다.

그러나 최영 장군은 굳건한 심기만큼 끝까지 진군하기를 요구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결국 '회군'을 감행한다.

이는 크나큰 변곡점인데

왜냐하면,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 수많은 군사를 이성계가 통솔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 창칼의 방향을 명이 아닌 고려 조정으로 돌린다면, 누가 막을수 있을까?

위화도 회군으로 결국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이게 곧 조선의 건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신흥세력이 '지금의 고려는 답이없다'라는 것에는 같은 뜻을 품었지만 그 이후의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먼저 포은 정몽주,

시스템을 개편하면 새로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굳이 왕조를 바꿀필요가 있는가? (-> 온건파)

그다음 삼봉 정도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기존의 고려로는 한계가 있다. 다시 처음부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고려는 불교의 나라다. 유교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역성혁명! (-> 급진파)

신흥 세력내에서도 이렇게 진영이 나뉘어 (의견이 나뉘어) 싸우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도 활약을 많이 했다.

특히 조선 건국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때려죽인 사건이 있다. 정몽주는 온건파의 대표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선죽교에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만나 하여가를 부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그러니까 조선 만들어서 잘해보자'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를 부른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리고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인다.

(엄밀히 말하면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가 철퇴로 죽였다. 그리고 선죽교는 상징일뿐 실제 선죽교는 아닐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지금 엄밀함으로 역사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10년도 더 되는 기억에 의존해서, 흐름상으로 살피는중이니 이러한 고증오류로부터는 면책을 받아보려 한다. 🤣

그리고 이제 조선이 건국되는데,

이 시점이 바로 처음 말한, 1392년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되고, 사실 나라를 건국한다라는 것은 '왕권'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세자는 '적장자'에게 물려주어야 명분이 생기는데 쌩뚱맞게 8남 이방석을 세자책봉을 하게 되는것이다.

이방원이 폭군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방원 입장에서는 굉장히 화가나는 지점

오늘날로 보면, 프로젝트 밤낮없이 고생하면서 성공시켰는데 갑자기 어 고생했어, 그러고는 승진은 다른사람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방석은 축출되고, 태조의 2남 이방과가 '정종'으로 추대된다. 그럼 이제 세번째 왕은 정종의 아들이 되는게 맞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원이 왕이 되었을까?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는데

명목상, 이방원을 이방과의 양자로 입적한다.

그래서 태종은 조선의 3대 왕이된다.

동생이 형보다 싸움을 더 잘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 형 입장에서는 그런 동생이 무서웠을 것이다.

조선의 3대 왕이 된 태종은 지금 이 혼란한 조선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실시한 대표적인 것이 '6조 직계제'

원래는 왕은 의정부와만 대면하였다.(의정부서사제)

의정부는 6조와 대면하면서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이는 사장이 임원하고만 대면하게 되는건데,

결국 임원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권력이란 곧 파워게임이므로 '신권'이 강하면 '왕권'은 비례하여 약해진다.

그래서 6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시킨다.

기존의 팀장들이 임원에게만 고하던 것을 이제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로 혁신된 것이다.

이 외에도 왕권을 위협할 만한 싹을 다 정리하였는데

이렇듯, 태종대에 이르러 조선이 안정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다음왕 '세종'

드디어 태종이 다져놓은 토양 위에서 '세종'이 조선의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업적은 말할게 너무나도 많지만,

'백성을 너무나도 사랑했다'라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은 백성을 사랑해서

'백성들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관료들이 고생해야한다'라는 철학으로 조선을 통치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고생이 밭갈고, 짐나르고, 그러한 힘쓰는 고생이 아니지만 말이다.

지독한 워커홀릭이였는데, 한 예로 황희정승은 백발이 정정해도 은퇴를 하지 못했다. 은퇴를 요청해도 모두 반려처리 당했었다.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뒤에,

이렇듯 관료들을 갈아 넣었다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나쁘다는 뜻으로 말한건 아니다.

우리들은 삼성이나 이런 회사에서 '역작'들이 나올때마다 외계인 고문한거 아니냐 이런말이 나오는데, 그런 느낌의 갈아넣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세자도 열심히 일을 했다.

이 세자가 바로 '문종', 조선의 4대왕이다.

너무 고생을 많이해서,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하게 된다.

즉 세자에게 '왕권'을 이양할 시간 자체를 확보하지 못하고 죽게된다.

이 때 조선의 5대 왕 단종의 나이 겨우 12살

문종은 죽기전, 측근 신하들을 부른다.

김종서,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 등

이들에게 단종을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왕의 마지막 부탁을 받은 사람들,

이들은 '고명신하'였다.

그냥 부탁만 한건 아니였다. 단종의 왕권이 너무 약하니, 그를 보필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황표정사'.

인사권을 얻는 것이 곧 권력이기도 하다.

(후에 이조 전랑을 두고 선조대에 붕당정치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단종을 지키기 위한 세력을 키우기 위한 좋은 수단이기도 하는데, 역설적으로 '김종서'와 더불어 권신세력들이 강력해진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변심한다면??

수양대군 입장에서는 화가날 것이다.

왕은 어려서 왕권이 없어,

또 김종서는 왕을 보위한다지만,

본인의 욕망으로 조선을 먹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명분상으로는 말이다.

이 마음이 영화 <관상>에서 잘 표현되어있다.

'이 나라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

그렇듯, 계유정난을 통해 세조는 김종서 세력을 척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계유정난이 웃긴게, 본인이 난(정변)을 일으킨 것인데 '계유년에 일어난 난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정변을 통해 왕위를 얻었으니 얼마나 명분이 약했을까?

단종을 폐위시켰지만,

두 차례의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었다.

세조 입장에서는 단종을 살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단종을 죽였다.

이게 <왕과 사는 남자>에서 그려지고있다.

또한 그 때문에 세조의 묘인 '광릉'은

악플 리뷰 세례를 받고있다.

이때, 왕의 책사가 있는데 바로 '한명회'다.

한명회는 세조를 왕으로만든 킹메이커 공신이다.

이를 필두로 '훈구세력'이 권력을 잡게된다.

훈구파의 시대가 온것이다.

훈구파가 중앙에 있다라는 이야기는,

훈구외의 세력들은 중앙으로 진출 할 기회자체가 희소해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중앙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으로 가게되는 선비들

이들을 두고 '사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림은 주목할만한 점이,

'향약'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게 매우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지방에 학원을 차린것이다.

이 독자적인 시스템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는 선비들이 조금씩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직은 훈구의 세상이었다.

그러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초한지의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살해한 것을 두고 조문을 올린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그러하고, 실질적으로는 '단종을 살해한 세조'를 비판한 것이다.

지금이야 이러한 비판이 정당할 수도 있겠는데

이때는 왕정이었고, 또 연산군 입장에서는 세조는 증조할아버지 아닌가?

내가 왕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네 할아버지 나쁜사람이야 라고 하면

일단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 나 싸움 개잘하는, 왕이야.

그럼 그 <조의제문>을 올린게 화가 날까 안날까?

단단히 화가난 연산군은 '무오야~' 하면서 '무오'년에 피의 학살을 벌였다.

이때 숙청된 인물들 중에는 사림 세력의 함유량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무오사화'라 불렀다.

그리고 갑자년, 폐비윤씨와 관련된 것이 트리거되어

연산군은 또 다시 피의학살을 벌였고 이 때도 사림세력의 함유량이 조금 있었다.

폐비윤씨는 연산군의 어머니인데,

성종과 부부싸움을 하다가 실수로 얼굴에 손톱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지금에야 문제 없겠지만,

그 때로 치면 왕의 얼굴

즉, 용상을 상하게 한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래서 폐비가 되고 결국 억울하게 죽게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연류된 자로는 한명회(세조대의 킹메이커 맞다)도 있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한 사람들을 참을 수 없었고 다 때려잡게 된것이다.

그런데 핵심인물인 한명회는 이미 죽었으니,

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서 파묘하여 그 시체를 꺼내 목을 잘랐다. '부관참시'다

이를 두고, 어머니의 억울함을 '갑자' -> 갑자사화 되시겠다.

그런데 여기서 '사화'라는단어는 조금 이상함을 느껴야한다.

스플래시 데미지에 사림들도 조금 함유량이 있을 뿐이었다. 천재지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것을 참변이라 부르는게 아니고 그중에 있는 '특정 세력'이 화를 입었다라고 기록하는 것이 이상해야 정상이다.

왜 굳이 '사화'라 하였는가의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후손들의 기록이다.

안그래도 중앙 진출한 사림 세력은 적은데, 그들이 조금이라도 희생된다면 크나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사림'입장에서는 큰 피해로 기억할 것이다.

이를 두고 '사화(선비가 화를 입음)'이라 기록했다는 점, 이는 곧 '사림'세력이 결국은 득세하게 될 것 임을

기록을 통해 '역사가 스포'하고 있다라는 지점이다.

다음으로, 중종대였는가?

어느날, 나뭇잎에 개미들이 갉아먹은 흔적이 있는데

'주초위왕'이라고 적혀있는것이 아닌가?

이거 참 '기묘'하군 -> 기묘사화

이는 훈구파 입장에서 사림세력이 자꾸 중앙으로 진출하니, 그들을 눌러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것이다.

'주초위왕' -> 여기서 주초를 합치면 '조'가 된다.

'조씨가 왕이 된다' -> 조광조가 역모를 꾀한다.

라고 훈구파가 '사림'세력을 정확히 타겟팅하여 공격한 사건이다. 앞의 두 사화와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을사사화가 있는데, 아쉽게도 잘 모르고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4대 사화관련 문제가 나오면

이 3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하나의 사화를 다루는 사화라는 정도만 알고있으니 문제풀이는 가능하나 설명은 1도 불가능한 상황이라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렇듯, 사림세력은 4번이나(더 있었겠지만 큰 사건위주로) 화를 입었지만 결국 이기는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바로 아까 말한 '향약'시스템 덕분이다.

'훈구'세력은 고인물이지만, '사림'세력은 계속해서 흐르는 샛물같은 존재였다.

이 향약에서 계속해서 중앙에 선비들을 보내게 되어

결국 물갈이에 성공하여 선조대에 이르면 '사림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시작도 온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

그런데 여기부터는 또 자세히 모르니 공부가 필요하여 다음에 논하겠다.

추가적으로 '붕당 정치'에 대해 내가 배울때는

이때 부터 정치판이 펼쳐진 것처럼 배웠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 시기를 두고 굉장히 비판을 많이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막 당파싸움이 일어났다.. 얼마나 요즘의 정치판이냐...' 이런식

그때는 무조건적으로 배웠는데 지금 보면 사실 무용한 분석으로 보인다.

지금 내가 기술한 부분에서만 해서도 세력이 얼마나 많이 나뉘었는가?

이는 '한국만의 특징'도 아니고 '인류의 보편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유한한 자원을 나누기 위해서는 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미 권한을 가진 기득권들과 이대로는 못살겠다 신흥세력이 나타나고 또 싸우게되고..

이건 '조선'의 특징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특징이고

헤겔의 변증법적 삼단논법에서도, 정반합의 논리로 정리한 바가 있다.

그래서 좁은 의미의 해석만 요구했던 이때의 주입식 교육에 대해서 조금은 반성하는 바이다.

(그런데 내가 왜 반성해야하지? 나는 그냥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한것일 뿐인데.. ㅎㅎ)

마지막, 추가적으로 '붕당'이라 하면 붕우유신에서의 '붕'과 같은 '붕'이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당을이루었다 하여 '붕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건 오늘날로 치면 Party이고, 정당인데

왜 정당이라 부르지는 않느냐 하면

이때에는 왕정이니까 '정당'이 의미가 없다.

왕은 고정적으로 한명이고, 뜻이 맞는 집단끼리 세력을 이루어 정치판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이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전기가 마무리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 전기의 맥락을 나만의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서두에 밝혔듯 10년도 더 된 학창 시절의 기억에만 의존한 회고이기에, 엄밀한 역사학자의 잣대로 본다면 분명 크고 작은 오류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미디어 덕분에, 오래된 기억임에도 꽤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는가.

이 또한, 긴 답변이 될 것 같다.

사실 "한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역사니까 당연히 알아야 한다"라 답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답변은 늘 모호하다 생각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함의 이유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 때문이라 생각한다.

  1. 첫째, 역사는 결국 단순하게 말하면 '인류의 오답노트'다. 모든 인간은 유한한 시절을 겪으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자체가 희소하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내 삶에 적용했을 때 더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라는 점이다.

  1. 둘째로는 우리의 '민족성 고취'라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역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한민족'이라는 뿌리를 공유하며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정신적 지주이자 사회적 약속이다.

이는 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역사'는 한민족에게 있어서 '경전'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본다. 종교 집단에서 경전을 모르는 자가 배척당하듯, 역사적 상식을 모르는 자가 사회적 동질감에서 소외되는 현상은 일종의 '집단 방어 기제'라고 본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같은 나라의 정체성이 말살당하는 억압의 시대에서는 우리들의 민족성을 잃지 않았어야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외침은, 이 맥락에서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언제든 이단심문관에게 교리와 신념을 의심받을 수 있는 이단자가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이방인이 되지 않고자 '한국사'를 공부해야만 할 것이다.

방금 나의 발언이 누군가에게는 이단자의 분석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이 땅의 밥을 먹고 살아온 바, 감정적으로는 당연히 나도 종교적으로 역사를 받들고 있기도 하다.

더욱이 풍패지관 전주에서 반평생을 나고 자란바, 삶에서 빼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맹목적인 광신도가 되고싶지는 않기에,

이러한 이성적 분석과 감정적 수용의 두 가지 관점을 견지하는 것,

그것이 역사를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치를 오롯이 지켜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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